무라카미 하루키-댄스 댄스 댄스


댄스 댄스 댄스
하루키 댄스댄스댄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 책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을 쫓는 모험 등을 잇는 작품이라는 소개는 책을 빌린 후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각각 다른 이름으로 시리즈 물을 발간하는 작가를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이외에 알지 못하였다. 책 홍보를 하려는 건지, 자신이 지은 책의 스토리 진행 중에 다른 책의 내용을 끼워 넣는 실망스러운 태도로 인해, 나는 이런 류의 시리즈물에 대한 반감이 크다. 그런데 애초에 하루키가 시리즈물을 쓰는 사람이었던가?
 
 일할 거리가 생겨 지방에서 일주일 동안 시간을 때워야 했던 나는 도서관에서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빌렸었다. 한 번 읽은 책이었고, 주인공이 느끼는 상실감이 아직도 생생했기에 다시 한 번 읽는다는 것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영화 위플래시를 감명 깊게 봐 놓고도 다시 한 번 볼까 하는 생각에는 이내 고개를 젓고 마는 까닭과 비슷하다. 단지 이번에는 마땅히 따로 읽고 싶은 책도 없었고, 지방으로 내려가야 할 기차 시간은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급하게 손에 쥐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에 노르웨이의 숲을 끝마치고는 기억 속에 이미지로 박혀있던 ‘상실감’을 어느 정도 지워내게 되었다. 그것보다는 마지막에 주인공이 모든 상처를 털어놓으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가슴에 남았다. 물론 그 이후에 여자 주인공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는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지만서도,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지방에서의 일을 끝마치고 학교 도서관에 도착해서는 하루키의 책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생각을 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책은 선택하기가 끝까지 망설여졌다. 영화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처럼 정말로 춤에 관한 내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도무지 하루키가 댄스 스포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 책 또한 단순히 단편이 아니라는 점만을 고려하여, 집에 돌아가려는 열차 시간에 쫓기며 급하게 고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급하게 책을 고르고 나서야 이 책이 시리즈 물이라는 소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서로서로 독립된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지만 주인공이 똑같은 책이 완전히 독립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책의 중간 중간은 이해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넘겨야 했다. 다 읽은 후에야 느끼는 바이지만, 앞의 두 책은 필시 상실의 시대와 비슷한 류의 상실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싶다. 친했던 친구의 죽음부터 이야기가 시작하는 걸로 보아 그에 관련된 상실감일 것이다. 하지만 그 편이 내게는 훨씬 좋게 다가왔다. 마침 상실의 시대도 다 읽었겠다, 또 다시 하루키식 상실감을 맛보는 것은 역시 꺼려졌다. 이 책은 그런 각종 상실감을 겪은 사람의 ‘회복’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룬 내용이었다. , 이게 도대체 가능은 한 일인가? 하루키가 주인공의 회복에 대해 쓴 글을 읽을 수 있다니. 물론 상실의 시대를 비롯하여 해변의 카프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등등 그의 모든 책들이 단순히 주인공이 느끼는 좌절에서 그치지 않고 회복을 위한 노력을 서술했지만, 이 책은 좀 더 특별하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어떤 이유에서인지 좌절한 상태였고(아마 양을 쫓는 모험 등 이전의 시리즈에서 서술되었겠지만) 주인공은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좌절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극복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키 책들의 다른 주인공들인 와타나베(상실의 시대), 다자키 쓰쿠루 등 모든 인물들의 해피 엔딩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루키가 묘사하는 것들은 묘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군대에 있을 때 다자키 쓰쿠루를 읽다가 수영을 배우고자 마음먹어 외출 나올 때 종종 수영을 하러 부대에서 멀리까지 이동을 하기도 했고, 해변의 카프카를 읽다가 조니 워커의 매력에 빠지게 되어 각종 위스키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그런 사물 이외에도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 또한 기가 막히게 매력적이다. 문제는 하루키가 종종 그런 인물들을 그저 방치해 버린다는 것이다. 방치라면 그나마 낫지, 때로는 아예 실종을 시켜 버린다. 다행히도 이 책에서 실종되는 사람들은 없었다(이유 없이 죽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심각하게 매력적으로 그려졌던 주연급 조연의 결말은 그저 방치해 버렸다.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인지,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런 아쉬운 감정들이 계속해서 하루키 책들을 읽게 하는 요소가 되곤 한다. 이 책에서는 매력적인 조연들이 좀 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주인공의 결말에 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양을 쫓는 모험 등 이 책 이전의 시리즈를 바로 읽을 엄두는 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하루키식 상실감은 거부감이 든다. 다음 책은 하루키의 에세이나 단편집을 읽으면서 하루키가 어떻게 대상을 이토록 매력적으로 묘사하는지 생각해 볼 예정이다. 나도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바라보는 시선들이 극도로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유혹하는 글쓰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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